[서정희 칼럼] 아무도 모를 줄 알았지? 양심은 읽음 표시를 남긴다 잠언 24장 7~14절

칼럼·기고 / 노승빈 기자 / 2026-10-31 17:5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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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인 서정희 작가

 

살다 보면 모르는 것이 약이 될 때도 있지만, 모른다는 말이 비겁한 변명이 될 때도 있다. 정말 몰랐던 것인지,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알면서도 모른 척한 것인지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다.


심리학에는 ‘방관자 효과’라는 말이 있다. 위급한 상황을 목격한 사람이 많을수록 오히려 아무도 나서지 않는 현상이다. 누군가는 도와주겠지, 다른 사람이 신고했겠지 생각하며 책임을 서로에게 미루는 것이다. 사람이 많다고 반드시 도움이 많아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많은 사람 속에 책임이 숨어 버린다.


잠언 24장 11~12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육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이 말씀은 모른다는 말로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일깨운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만 보시는 분이 아니다.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왜 외면했는지,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까지 아신다. 사람에게는 감출 수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감출 수 없다.
나는 방송 활동을 오래 해서인지 길에서 알아보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다. “서정희 씨 아니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반갑기도 하고 조금 민망하기도 하다. 반대로 “저 TV 안 봐요. 누구시죠?”라고 되묻는 분도 있다. 그럴 때면 웃음이 난다. 사람마다 아는 것이 다르고, 관심을 두는 것도 다르니까.


그런데 나 역시 누군가의 메시지를 읽고도 답하기 곤란해 한참 미룬 적이 있다. 나중에는 “미처 못 봤어요”라고 둘러대기도 했다. 하지만 휴대전화에는 읽음 표시가 남아 있다. 읽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눈은 피할 수 있어도 기록은 남는다.


요즘 영화 제목처럼 떠오르는 말이 있다.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누군가 내가 한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섬뜩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잊지 못해 뒤쫓는 분이 아니라, 시간에 갇히지 않고 우리의 모든 시간을 아시는 분이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하나님께는 우리의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처럼 놓여 있다는 관점을 설명한다. 내가 지나간 일이라고 덮어 둔 순간도 하나님 앞에서는 감춰진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려움을 겪는 모든 사람의 사정을 내가 다 책임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요즘은 SNS나 문자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나를 아는 사람도 있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도 있다. 겉으로는 여유 있어 보여도 내게도 감당해야 할 형편과 사정이 있다. 모든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다. 돈을 보내는 것만이 도움도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돕고, 어려우면 어렵다고 정직하게 말하고, 다른 방법이나 도움받을 곳을 함께 찾아줄 수도 있다.


외면하지 않는 것과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것은 다르다.
나에게는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내가 어려웠을 때 손을 내밀어 준 동생이다. 시간이 흘러 그 동생이 힘든 일을 겪었을 때 이번에는 내가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충분히 돕지 못했다. 동생은 갚으라고 한 적도 없는데 내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마음의 빚이란 돈처럼 계산해서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무게가 오래 남아 몸까지 힘들어 병원을 찾기도 했다.


받은 사랑을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돌려줄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낼 수는 있다. 내가 받은 친절을 기억하고, 누군가에게 건네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보답일지도 모른다.


잠언은 지혜를 꿀에 비유한다. 꿀을 먹으면 달고, 그것을 맛본 사람은 다시 찾는다. 나도 아침에 찰떡이나 가래떡을 구워 꿀에 찍어 먹는 것을 좋아한다. 고르곤졸라 피자도 꿀에 찍어 먹으면 별미다.


 꿀의 세계도 꽤 다채롭다. 맑고 부드러운 아카시아꿀이 있다.짙은 향과 쌉싸름한 맛을 가진 밤꿀도 있다. 여러 꽃의 향이 어우러진 야생화꿀, 깊고 진한 풍미의 메밀꿀도 있다. 뉴질랜드의 마누카꿀은 고가의 프리미엄 꿀로도 유명하다. 가격이 비싸다고 누구에게나 최고의 맛은 아닐 것이다. 나 역시 밤꿀은 향이 너무 진해 내 입맛에는 조금 부담스럽다. 꿀도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다. 나는 개인적으로 향이 없는 꿀이 좋다. 단맛 만을 좋아하는 것 같다.


지혜도 마찬가지다. 책에서 읽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직접 맛보고 삶에서 살아 내야 한다. 잠언 24장 14절은 지혜를 얻는 일이 장래와 소망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히브리어로 장래는 ‘아하리트', 소망은 ‘티크바’다. 


지혜는 당장 눈앞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는 마법 같은 답이 아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무엇을 붙들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분별하게 하며, 그 분별이 내일을 향한 소망이 되게 한다. 이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요즘 귀에 자꾸 맴도는 노래가 있다. 조선 힙합의 〈너나 제발 잘하세요〉다. 남의 일에 참견하고 훈수를 두는 사람에게 던지는 통쾌한 한마디가 반복된다.
“저기요 님, 지금 할 거 없으세요?
너나 잘하세요!”
노래를 듣다 보면 웃음이 난다. 그런데 잠언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그 말이 꼭 나에게 돌아오는 것 같다. 남의 마음을 저울질하기 전에 내 마음부터 살펴야 하지 않을까. 남의 잘못을 찾아내기 전에 내 양심의 읽음 표시부터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은 나 자신에게 먼저 말해 본다.
“너나 제발 잘하세요!”
그런데 한 가지 더 보태고 싶다.
“제발 꿀 좀 드세요!”
남에게 쏘아붙이는 말은 조금 줄이고, 말씀의 꿀은 조금 더 먹자. 꿀은 참 달고 맛있다. 떡에도 찍어 먹고 피자에도 찍어 먹고, 한 번 맛보면 자꾸 생각난다. 지혜도 그랬으면 좋겠다. 한 번 맛본 사람이 자꾸 찾고, 그 달콤함을 혼자만 누리지 않고 누군가에게 건네는 것.
나에게는 엄격하고 이웃에게는 달콤한 사람. 남을 판단하는 데 쓰던 마음을 누군가를 살리는 데 쓰는 사람. 어쩌면 지혜란 그렇게 살아가는 일이 아닐까.
주님, 오늘도 말씀의 꿀을 주세요. 제 입에도 달고, 제 삶에도 달고, 제가 만나는 사람에게도 달콤한 지혜가 되게 해 주세요.
“주님, 꿀 좀 더 주실래요?”

 

서정희 성경 큐티 필사 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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