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방송인 서정희 |
돌아갈 집을 잊지 않는 사람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의 《The Odyssey》를 보고 난 뒤 한동안 영화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오래된 고대 서사가 거대한 스크린 위에서 다시 펼쳐지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이야기는 끝났는데 장면들은 끝나지 않았다. 자꾸 마음속에서 되살아났다.
특히 영화를 보기 전에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트로이 전쟁의 배경을 조금이라도 알고 가면 영화가 훨씬 깊게 다가온다. 브래드 피트가 출연한 영화 《트로이》를 먼저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오디세우스가 누구인지, 트로이 전쟁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보면 장면 하나하나가 다르게 보인다.
그래서 영화의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누군가와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듯 이 영화를 정리해 보고 싶었다.
어쩌다 보니 내가 영화 칼럼니스트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평론가가 아니다.
이 글은 영화의 완성도를 평가하거나 감독의 연출을 분석하는 글이 아니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내 마음에 들어온 질문들을 오래 들여다본 기록이다.
그리고 나는 기독교인이다.
그래서 영화를 볼 때도 나의 눈으로만 볼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한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고, 한 사람을 만나면서 그 안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생각한다.
영화가 기독교 영화여서가 아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이미 그렇게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은 결국 한 기독교인이 《The Odyssey》를 보고, 그 안에 비친 인간의 모습과 하나님의 마음을 더듬어 본 이야기다.
제우스의 법 — 낯선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3시간 가까운 상영 내내 유난히 귀에 들어온 말이 있었다.
‘제우스의 법.’
낯선 나그네를 함부로 대하지 말 것.
배고픈 사람이 찾아오면 먹을 것을 내어줄 것.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줄 것.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것을 크세니아(ξενία, xenia), 곧 손님 환대라고 불렀다. 나그네와 손님을 보호하는 것이 제우스의 뜻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대목에서 성경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브라함에게 낯선 세 사람이 찾아왔을 때였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로 여기지 않았다. 급히 장막으로 달려가 사라에게 떡을 만들게 하고 좋은 송아지를 준비해 정성껏 대접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히브리서 13:2)
그 장면에서 재미있는 것은 사라의 반응이다.
사라는 장막 뒤에서 그 말을 듣고 웃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웃음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자기 앞에 찾아온 손님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누군가는 믿지 못해 웃고 있을 때에도, 누군가는 믿음으로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제우스의 법’이라는 이름으로 나그네를 환대했고, 성경은 나그네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따라 우리도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말씀한다(신 10:18-19).
그렇다면 나는 낯선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만 환영하는가.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사람만 귀하게 여기는가.
아니면 아무것도 돌려줄 수 없는 사람에게도 기꺼이 자리를 내어줄 수 있는가.
어쩌면 환대란 상대방의 가치를 알아보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를 먼저 생각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 질문을 품은 채 나는 오디세우스의 긴 귀환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01. 이타카 — 내가 돌아가야 할 곳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이상하게 귀에 꽂히는 장면이 있었다.
트래비스 스콧(Travis Scott)이 고대의 음유시인 페미오스(Phemius)로 등장한다.
그는 지팡이로 바닥을
쿵.
쿵.
쿵.
두드리며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랩처럼 읊는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그 비트가 너무 강렬해서 말보다 먼저 리듬이 몸에 들어왔다.
영화가 끝난 뒤 인터넷으로 그 장면의 노래를 다시 찾아봤다.
얼굴.
함대.
전쟁.
한 사람.
생각.
계략.
짧은 단어들이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하나씩 떨어졌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짧은 랩이 영화 전체를 이미 말하고 있었다.
한 얼굴에서 시작해 함대를 만나고, 전쟁을 지나 한 인간의 생각과 계략을 따라가며 결국 한 사람이 자기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호메로스의 이야기는 원래 글로만 읽는 것이 아니었다. 음유시인이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리듬을 타며 한 시대의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전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음유시인은 래퍼일지도 모른다.
3천 년 전의 서사와 21세기의 랩이 한 장면에서 만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이야기를 따라가며 자꾸 한 단어로 돌아왔다.
이타카.
처음에는 괴물들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외눈박이 괴물, 세이렌, 키르케,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칼립소.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괴물의 얼굴보다 내 얼굴이 더 많이 보였다.
나는 이 영화를 한 영웅이 괴물을 물리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로만 볼 수 없었다.
오히려 한 인간이 자기 안의 괴물들을 지나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찾아가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오디세우스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괴물을 죽였느냐가 아니다.
돌아가는 것.
이타카로.
생각해 보면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과 돌아갈 곳을 잊은 사람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산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면 잠시 길을 잃어도 다시 방향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목적지를 잊으면 길을 잃은 줄도 모른다.
그래서 나에게 이타카는 고향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나의 본향.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인지 잊지 않는 것.
천국의 소망을 잃어버리면 나는 이 땅의 칼립소 섬을 영원한 집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의 이타카는 어디인가.
02. 텔레마코스 — 기다리는 사람도 영웅이다
처음에는 오디세우스만 보았다.
괴물과 싸우고 바다를 건너 수많은 죽음과 유혹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려는 영웅.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자꾸 마음에 남는 사람이 있었다.
텔레마코스.
아버지가 전쟁에 나갔을 때 그는 아직 아기였다.
그에게 오디세우스는 ‘아버지’라는 이름은 있지만 함께 살아본 기억은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세상에서는 영웅이었지만 아들에게는 부재한 아버지였다.
그 생각을 하다가 나는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나는 다섯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래서 내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이상할 만큼 비어 있다.
전축 앞에서 아버지와 춤을 추고 있었다는 기억 하나가 있다. 그런데 그것조차 정확한 기억인지,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가 내 기억이 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목소리가 어땠는지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했다.
어쩌면 사람은 기억하는 사람만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할 수 없어서 더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아빠와 손을 잡고 뛰어가는 아이들을 볼 때면 부러웠다.
그들에게는 너무 당연한 장면이 내게는 평생 한 번도 갖지 못한 장면이었다.
삶이 무너지는 것 같을 때,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에 이상하게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도 아버지였다.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다.
아버지 품에 한 번만 안기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내가 부를 수 있는 아버지는 없었다.
그래서 텔레마코스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래도 아버지를 찾아가는 아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또 하나의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하나님 아버지.
내게는 ‘아버지’라는 말 자체가 참 낯설었다.
평생 일상에서 아버지를 불러본 기억이 거의 없는데 어느 날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다.
처음에는 입으로는 아버지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그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래서 나도 찾아 나섰다.
하나님 아버지를 알기 위해서.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기 위해서.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그 아버지의 품을 조금씩 알아가기 위해서.
어쩌면 나의 믿음은 처음부터 확신의 믿음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찾아가는 믿음이었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를 찾아 나서듯 나도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내가 평생 그리워했던 것은 단지 세상을 떠난 한 사람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영혼 깊은 곳에서는 처음부터 나를 알고, 나를 기다리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품을 찾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오디세우스의 귀환보다 텔레마코스의 기다림이 내게 더 오래 남았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들.
아버지를 찾아가는 딸.
나는 그 둘 사이에서 나의 이야기를 보았다.
03. 페넬로페 —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오디세우스보다 페넬로페에게 더 큰 도전을 받았다.
앤 해서웨이(Anne Hathaway)가 연기한 페넬로페.
20년.
남편은 오지 않는다. 연락도 없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 사이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결혼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녀는 기다린다.
특히 옷을 짜는 장면이 오래 남았다.
낮에는 옷을 짠다.
밤이 되면 낮에 짠 것을 다시 푼다.
다음 날 다시 짠다.
또 푼다.
기다림을 시간의 낭비로 만들지 않고 시간 자체를 자기 편으로 만드는 것이다.
결국 그 사실이 들키고 전략은 무너진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의 품위를 잃지 않는다.
나는 그 모습에서 ‘우아하게 늙는다는 것’을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도 품위를 잃지 않는 것.
상처가 있어도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
기다림이 길어져도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는 것.
그리고 페넬로페에게서 잠언 31장의 현숙한 여인이 겹쳐 보였다.
현숙한 여인은 단순히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이 아니다. 부지런히 일하고, 지혜롭게 말하며, 가족을 돌보고, 자신에게 맡겨진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낸다.
“능력과 존귀로 옷을 삼고 후일을 웃으며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의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며.”
(잠언 31:25-26)
기다리는 여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인이 아니다.
기다림 속에서도 자기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다.
그래서 잠언은 말한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잠언 31:30)
어쩌면 진짜 아름다움은 시간을 이기는 얼굴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영화에서 나를 소름 돋게 한 장면이 하나 더 있었다.
결혼 초, 페넬로페와 오디세우스가 둘만의 작은 약속을 나눈다.
서쪽으로 가자.
다른 사람은 모르는 두 사람만의 비밀이었다.
20년이 흘렀는데도 그 약속은 사라지지 않는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약속도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증명하기 위한 맹세도 아니었다.
그저 두 사람만 알고 있던 한마디.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그 말이 다시 살아난다.
사람은 많은 것을 잊는다.
얼굴도, 목소리도, 오래전의 약속도 잊는다.
그런데 사랑은 때때로 세상이 잊어버린 작은 약속 하나를 기억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페넬로페와 오디세우스에게 ‘서쪽’은 단순한 방향이 아니었다.
두 사람만 기억하는 미래였다.
그래서 그 방향이 다시 살아나는 순간, 나는 사랑이란 결국 함께 바라보았던 방향을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또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바벨론 강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편 137:1)
그들은 포로로 끌려갔다.
낯선 땅에서 고향을 잃었다.
바벨론 사람들은 그들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묻는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시온을 잊는다는 것은 단순히 한 장소를 잊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잊는 것이었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 잊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페넬로페와 오디세우스의 ‘서쪽’과 이스라엘의 ‘시온’이 묘하게 겹쳐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기억한 방향.
하나님의 백성이 끝까지 잊지 않았던 방향.
신앙도 어쩌면 기억의 싸움인지 모른다.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구원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광야에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것.
동시에 뒤에 있는 것은 잊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
나는 이상하게 하나님이 이미 용서하신 과거는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는 쉽게 잊는다.
사람의 말은 오래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쉽게 잊는다.
상처는 붙들면서 약속은 놓아버린다.
그래서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것 역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페넬로페가 20년 전의 작은 약속을 잊지 않았듯 나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약속과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돌아갈 방향을 잊지 말아야 한다.
04. 폴리페모스 — 저주보다 하나님을 크게 보는 것
한쪽 눈을 가진 괴물, 포세이돈의 아들 폴리페모스.
그가 오디세우스를 저주해 달라고 포세이돈에게 기도하는 장면이 무서웠다.
사람이 사람을 저주한다.
그리고 신에게 그 저주를 이루어 달라고 빈다.
혹시 누군가 나를 저주하고 있다면?
내 일이 계속 꼬이는 것이 누군가의 저주 때문이라면?
그리고 더 무서운 질문.
내가 저주받는 사람이라면?
그런데 믿음의 눈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사람의 말이 아무리 무서워도 그 말이 나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사람의 저주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더 믿을 수 있는가.
저주가 무섭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저주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보는 사람.
그것이 믿음인지도 모르겠다.
05. 폴리페모스 — 괴물은 자만의 얼굴이기도 했다
폴리페모스와 싸운 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낸다.
‘Nobody’로 살아남았지만 마지막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힌다.
이 장면을 보며 나는 원작 『오디세이아』의 유명한 ‘Nobody’ 이야기를 떠올렸다. 원작에서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이름을 숨기기 위해 ‘아무도 아닌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Nobody는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결국 승리를 Nobody에서 자기 이름으로 남기고 싶었던 순간
나를 드러내는 순간이 오히려 더 큰 재앙을 불러온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인간의 자만을 본다.
나는 내가 잘해서 여기까지 왔다.
나는 똑똑하다.
나는 상황을 잘 안다.
내 이름이 알려져야 한다.
내가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지혜는 얼마나 작은가.
내가 나를 구할 수 있다는 믿음.
어쩌면 그것이 가장 먼저 무너져야 할 우상인지도 모른다.
06. 세이렌 — 나는 나를 믿을 수 있는가
세이렌의 노래 앞에서 오디세우스는 자기 몸을 돛대에 묶는다.
그는 “나는 강하니까 괜찮아”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인정한다.
나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없다.
이것이 지혜 아닐까.
유혹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 아니라,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환경을 묶어버린다. 내가 빠져나올 수도 없게, 나 스스로를 구할 수도 없게.
신앙생활도 어쩌면 그렇다.
모든 시험을 의지력으로 이기려고 하기보다 때로는 길 자체를 막아야 한다.
그리고 세이렌을 보며 성경의 말씀이 떠올랐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무엇을 들을 것인가의 문제다.
세상의 목소리는 너무 잘 들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에는 귀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07. 로터스 꽃잎 — 나는 지금 무엇을 먹고 있는가
로터스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편안하게 한다.
그리고 잊게 한다.
고향을, 목적을, 돌아갈 이유를.
오늘의 로터스는 마약일 필요가 없다.
SNS일 수도 있고, 쇼핑일 수도 있다. 끝없이 보는 영상일 수도 있고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내는 시간일 수도 있다.
“이 정도쯤이야.”
그렇게 하나씩 먹다 보면 나는 죽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왜 살아가는지를 잊는다.
그래서 로터스는 죽음보다 더 교묘한 망각처럼 느껴졌다.
나를 죽이지는 않지만 나의 지향점을 잊게 만드는 것.
그것이 내게는 가장 현대적인 감옥이었다.
08. 칼립소 — 안락함이라는 이름의 감옥
칼립소의 섬은 아름답다.
사랑도 있고 안락함도 있다.
그런데 7년 동안 오디세우스는 그곳에 머문다.
떠나야 하는데 떠나지 못한다.
사람을 붙잡는 것은 언제나 폭력이 아니다.
때로는 익숙함, 편안함, 두려움, 미련이다.
그리고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다.
나는 이것을 내가 경험했던 결혼생활과도 연결해 보게 됐다.
사랑이었는지.
안락함이었는지.
두려움이었는지.
혹은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머물렀던 것인지.
칼립소는 내게 한 가지 질문을 남겼다.
나는 무엇 때문에 떠나지 못하는가.
09. 키르케 — 돼지가 되어버린 인간
키르케.
사만다 모턴(Samantha Morton)이 연기한 가장 기괴하고 무서운 인물 중 하나다.
그녀는 사람을 돼지로 만든다.
그런데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질문이 달라졌다.
키르케가 인간을 돼지로 만든 것일까?
아니면 인간 안에 이미 있던 돼지를 드러낸 것일까?
먹고 싶다.
더 가지고 싶다.
더 인정받고 싶다.
더 사랑받고 싶다.
가져도 가져도 끝이 없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탐욕은 어떤 모습일까.
어쩌면 키르케의 마법은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욕망의 노예가 되었을 때 자신이 이미 무엇이 되어버렸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인지도 모른다.
10. 태양신의 소 — 먹지 말아야 할 것
스킬라와 카리브디스를 지나며 오디세우스와 병사들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여섯 명의 동료가 죽었다.
남은 사람들도 지칠 대로 지쳤다.
그때 태양신 헬리오스의 섬 트리나키아에 도착한다.
오디세우스는 분명히 경고한다.
먹지 말라고.
그런데 바람이 불어 배를 띄울 수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흐르며 식량이 떨어진다.
눈앞에는 먹음직스러운 소들이 있다.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배가 고팠다.
결국 병사들은 소를 잡아먹는다.
나는 이 장면에서 에덴동산을 생각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알았다.
그런데 손을 뻗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알면서도 원하는 것.
“이번 한 번만.”
“이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어.”
“너무 힘드니까.”
우리는 죄를 지을 때 얼마나 쉽게 상황을 이유로 삼는가.
그러나 상황이 힘들었다고 해서 말씀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몰라서 먹은 것이 아니다.
알면서 먹었다.
그래서 이 장면은 말씀과 욕망이 충돌하는 순간, 나는 누구의 말을 선택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사람은 강할 때보다 지쳤을 때 무너진다.
평안할 때보다 궁지에 몰렸을 때 타협한다.
그래서 믿음은 상황이 좋을 때만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가장 힘든 순간에도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말씀으로 인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너무 지쳐서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이번만’이라고 부르고 있지는 않은가.
그들의 배고픔 속에 내 욕망이 있었고, 그들의 불순종 속에 내 모습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쉽게 비난할 수 없었다.
11.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 어느 쪽으로 가도 아픈 길
어떤 선택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중에서 고르는 일이 아니다.
한쪽으로 가면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 모두 죽는다.
다른 쪽으로 가면 스킬라에게 여섯 명의 병사가 죽는다.
둘 다 아프다.
둘 다 무섭다.
어느 쪽으로 가도 무언가를 잃는다.
살다 보면 이런 선택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고통 없는 길을 달라고 기도하지만, 때로 하나님은 고통이 없는 길보다 함께 지나갈 길을 주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믿음은 폭풍이 없는 바다가 아니라 폭풍 속에서도 배의 방향을 잃지 않는 것일 수 있다.
12. 시논 — 나는 누구의 말을 믿고 있는가
시논을 보면서 말의 힘을 생각했다.
전쟁에서는 칼과 창만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때로 사람은 말 하나에 마음을 내어준다.
사람은 무엇을 보았는가보다 누구의 말을 믿었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시논은 내게 묻는다.
나는 누구의 말을 믿고 살아가는가.
세상의 말인가.
사람들의 평가인가.
내가 오래 품어온 상처의 말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인가.
“너는 안 돼.”
“너는 실패했어.”
“너는 사랑받을 수 없어.”
그런 말을 오래 믿으면 어느 순간 그것이 내 정체성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신앙은 모든 말을 믿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말에 내 인생의 방향을 맡길 것인가를 분별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13. 헬레네 — 무엇을 아름답다고 여기며 사는가
그리고 헬레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명성을 가진 사람.
그러나 그녀의 이름 뒤에는 한 시대를 뒤흔든 전쟁이 있다.
영화 속 헬레네를 보면서 나는 ‘아름다움’의 기준을 다시 생각했다.
성경에는 놀라운 말씀이 있다.
“나는 검으나 아름답다.”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이 자신을 그렇게 표현한다.
그녀는 자신의 피부가 햇볕에 그을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의 눈에는 여전히 아름답다.
나는 그 말이 참 좋았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부족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아름답다고 말씀하시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평가하고 미워해도 하나님의 시선은 다르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
(아가 6:10)
아름다움은 단순히 얼굴의 대칭이나 피부의 색깔이 아니다.
시간을 견디는 힘.
상처를 품는 품위.
자신의 존재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당당함.
어쩌면 그것이 더 오래가는 아름다움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도 이 말씀을 들려주고 싶었다.
하나님은 나를 검으나 아름답다고 말씀하신다.
세상이 정한 기준 때문에 나 자신을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규정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가졌는가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바라보시는가가 더 중요하다.
시간이 지나면 얼굴은 변한다.
젊음도 사라지고 사람들의 관심도 지나간다.
그러나 사람의 중심은 그보다 오래 남는다.
어쩌면 진짜 아름다움은 늙지 않는 얼굴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도 망가지지 않는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14. 아르고스 — 아무도 알아보지 못해도
그리고 나는 이 개를 잊을 수가 없다.
아르고스.
20년 동안 주인을 기다린 개.
사람들은 오디세우스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런데 아르고스는 알아본다.
죽어가면서도 꼬리를 흔든다.
나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생각했다.
사람은 나를 잊을 수 있다.
나를 오해할 수도 있다.
내가 누구인지 더 이상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잊지 않으신다.
내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지 하나님이 나를 잊으시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한다.
나는 무엇의 냄새를 풍기며 살고 있는가.
세상의 냄새인가.
욕망의 냄새인가.
상처의 냄새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향기인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삶의 냄새까지 하나님을 향해 가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15. 눈먼 에우마이오스 —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
에우마이오스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 인물을 보면서 오히려 내 모습을 생각했다.
성경에는 수많은 소경이 나온다.
눈을 뜨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찾아온 사람들.
그런데 나는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사람의 마음을 보지 못하고, 말씀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한다.
내 앞에 은혜가 있는데 불평만 보고,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길을 두고 내 앞의 벽만 바라본다.
어쩌면 진짜 소경은 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보고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가끔 나 자신을 ‘눈 뜬 소경’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믿음을 이렇게 말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1)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아직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실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영원한 생명, 부활,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아직 보지 못한 하나님의 미래.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본 척하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실재한다고 믿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눈은 눈이 더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바라볼 것인지가 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16. 아테나 — 하나님은 때로 설명하지 않고 함께 계신다
호메로스의 원작에서 아테나는 중요한 존재다.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돕고 텔레마코스를 이끌며 그의 여정에 개입한다.
놀란의 영화에서 젠데이아(Zendaya)가 연기한 아테나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있는 존재처럼 오디세우스에게 나타난다.
나는 이것이 묘하게 성경적이라고 느꼈다.
하나님이 늘 눈앞에 나타나
“이쪽이다.”
“저쪽이다.”
말씀해 주신다면 믿음이 얼마나 쉬울까.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때로 보이지 않는다.
침묵하신다.
설명하지 않으신다.
그런데도 돌아갈 길을 완전히 잃지 않도록 작은 빛 하나를 남겨두신다.
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17. 그리고 아버지 — 영웅도 죄책감을 가지고 돌아온다
오디세우스는 완벽한 영웅이 아니다.
그는 승리했지만 그 뒤에는 수많은 죽음과 죄책감이 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모든 것을 해내는 영웅이라기보다 자신이 한 일의 결과를 짊어진 상처 입은 인간으로 보게 됐다.
아버지는 영웅이 되기 위해 떠났지만 아들은 아버지 없는 세상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아들은 이미 아버지가 없어도 자기 인생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이것을 보면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다시 생각했다.
내가 가족에게 남기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이루어낸 성공인가.
내가 받은 명예인가.
아니면 내가 사랑했던 흔적인가.
아버지가 아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은 영웅의 이름이 아니라
“나는 너를 떠났지만 너를 잊은 적은 없다.”
라는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모든 괴물은 나였다
폴리페모스는
내 안의 자만.
세이렌은
내 안의 충동.
키르케는
내 안의 탐욕.
로터스는
내 안의 망각.
칼립소는
내 안의 안주.
스킬라와 카리브디스는
내가 피하고 싶은 선택.
폴리페모스의 저주는
내 안의 두려움.
태양신의 소를 먹은 사람들은
내 안의 불순종.
시논은
내가 쉽게 믿어버리는 말.
헬레네는
내가 무엇을 아름답다고 여기는지에 대한 욕망.
페넬로페는
내 안에서 사라져가는 인내.
텔레마코스는
내 안에서 아직도 아버지를 찾고 있는 아이.
에우마이오스는
보이지 않아도 믿는 나.
아르고스는
시간이 지나도 주인을 알아보는 기억.
그리고 오디세우스는
그 모든 것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나 자신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에 이 질문 앞에 선다.
나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무엇에 안주하고 있는가.
어떤 로터스를 먹고 있는가.
무엇을 탐하고 있는가.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이제는 놓아주어야 하는가.
무엇보다,
내가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가.
오디세우스에게는 이타카가 있었다.
나에게는 무엇이 있는가.
내가 돌아갈 집.
내가 거할 곳.
내가 마지막까지 잃지 말아야 할 소망.
나는 그것을 본향이라고 부르고 싶다.
세상에서 아무리 오래 길을 잃어도 돌아갈 곳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직 완전히 길을 잃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어쩌면 믿음이란 내가 하나님을 끝까지 잘 붙잡는 것이 아니라,
내가 놓아버린 순간에도 하나님이 나를 놓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다에는 괴물이 있고 내 안에도 괴물이 있다.
때로는 저주가 두렵고, 유혹이 달콤하다.
칼립소의 섬이 너무 편안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때로는 내가 짠 것을 밤마다 다시 풀어야 할 때도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기다림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하는 날도 있다.
그래도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집을 잊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직 귀환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내 머릿속에는 처음 들었던 그 비트가 남아 있었다.
쿵.
쿵.
쿵.
처음에는 그저 강렬한 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니 그 리듬이 다르게 들렸다.
한 사람이 길을 떠난다.
괴물을 만나고, 유혹을 지나고, 사람을 잃고, 자신의 죄와 마주하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가 다시 한 사람의 입을 통해 노래가 된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도 하나의 이야기인지 모른다.
내가 지나온 상처.
내가 잃어버린 사람.
내가 잘못 선택했던 순간.
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내가 돌아가야 할 곳.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흩어진 장면들을 마지막에는 하나의 이야기로 묶으실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묻는다.
나의 이타카는 어디인가.
내가 돌아갈 집은 어디인가.
내가 마지막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고, 무엇을 잊어야 하는가.
나는 오늘도 그 질문을 품고 바다를 건넌다.
그리고 아직 믿는다.
돌아갈 집을 잊지 않는 사람에게는
언젠가 귀환이 있다.

















